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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15달성서씨
  2. 2019.09.15여수 달성서씨문 세거내력
  3. 2017.12.01달성서씨 유허비
  4. 2017.12.01구암서원 숭현사
  5. 2017.12.01서침 나무
  6. 2017.12.01§ 서씨(達城 徐氏)의 유래§
  7. 2017.12.01§달성서씨(達城徐氏)의 유래 §
  8. 2017.12.01◈◈달성서씨 9대派 및 각 파조◈◈
  9. 2017.12.01충절의 가문 달성서씨
  10. 2017.12.01달성達城·대구서씨大丘徐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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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


시조 서 진(徐晋)은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 영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대대로 달성에 살면서 달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있다.
시조의 증손 서균형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을 지냈다. 당시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아들 서 침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조선이 개국한 후 조봉대부로 전의소감을 지냈다.
서 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서문한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차남 서문간은 중시에 올라 역시 현감을 역임했다. 막내 서문덕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가문의 기반을 닦은 인물은 조선 초기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다. 그의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양촌 권 근의 외손이다. 그는 세종 2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까지 6대 왕조 45년에 걸쳐 6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다. 서거정의 형 서거광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서 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와 결혼한다. 둘째 아들 서경유의 증손 서종제의 딸은 영조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서경주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막하의 선봉수문장 서수천은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노량해전에서 무공을 떨쳤다. 서병오는 서화에 탁월하여 한말에‘팔능(八能)’으로 일컬어졌다. 서상일은 독립운동가로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영친왕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잡힌 서상한(서상일의 아우)도 명성을 떨쳤다.
현대 인물은 서정희(제헌국회의원), 서우석(제헌국회의원), 서돈각(경북대총장), 서성택(국민대재단 이사장), 서정상(우석대 이사장), 서익원(대구고검 차장검사), 서경석(외무부기획관리실장), 서민석(동일방직사장), 서정한(한국합금철회장, 기독실업인 회장), 서갑석(한국리스 회장), 서명원(충남대총장), 서영호(재일대판거류민단장), 서정국(서울고검검사장), 서정식(경전전무), 서원석(기업은행전무), 서형석(대우 전무), 서이석(경기은행 수원지점장), 서정철(예비역 육군준장), 서정학(예비역육군준장), 서정화(내무부장관), 서정신(법무부 차관), 서병찬(조흥은행장, 기업은행장, 금융통화운영위원), 서청원(국회의원), 서석재(국회의원), 서종열(국회의원), 서상목(국회의원), 서상철(동자부장관), 서영훈(국무총리), 서종철(국방장관), 서일교(대법관), 서윤홍(대법관), 서석준(상공부장관), 서항석(극작가), 서정주(시인), 서기원(소설가), 서정길(천주교 대구교구대주교) 씨 등이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한편 이 명단은 대구서씨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항렬자는 20世 열(烈), 21世 규(圭) 곤(坤) 규(奎), 22世 진(鎭) 석(錫) 현(鉉), 23世 수(洙) 영(泳) 윤(潤), 24世 상(相) 동(東) 춘(春), 25世 교(敎) 병(丙) 병(炳), 26世 보(輔) 정(廷) 규(圭), 27世 덕(德), 28世 (水변), 29世 (木변), 30世 (火변)이다. 주요파는 현감공파, 학유공파, 판서공파, 감찰공파, 진사공파, 생원공파, 진사공파, 참판공파, 종사랑공파 등 9파가 있다.
본관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다. 6세기 경에는 신라에 귀속되었다.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초기에 위화군(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일대)과 달구화현(달구벌)으로 나뉘어 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위화군은 대구현(大丘縣)으로,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 추량화현은 현효현(玄驍縣), 치성화현은 해안현(海安縣)으로 각각 바뀌었다. 대구현은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 星州)의 속현이 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현령을 둠으로써 승격하기 시작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영조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대구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대구부의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이 대구부로 독립하고 옛 대구부의 일부와 현풍군의 일부가 통폐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1938년 달성군의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고,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편되었다.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달성과 지명이 같지만 달성서씨(達城徐氏)와 대구서씨(大丘徐氏)는 시조를 달리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 뿌리도 다르다. 한편 오늘날 대구 지명은 큰대(大), 땅이름구(邱)를 써서 대구(大邱)가 맞다. 그런데 대구서씨(大丘徐氏)의 대구는 큰대(大), 언덕구(丘)를 쓰고 있다. 이렇게 한자가 다른 데는 이유가 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붙여진 이름은 바로 대구현(大丘縣)으로 원래 한자로 대구(大丘) 였다. 그 뒤 조선 영조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바꾸었다. 한글 이름은 똑같고 한자 이름만 바뀐 것이다. 오늘날 대구서씨는 한자로 대구서씨(大邱徐氏)가 아니라 대구서씨(大丘徐氏)가 맞다.
한편 달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달성구씨(達城具氏), 달성김씨(達城金氏), 달성배씨(達城裵氏), 달성서씨(達城徐氏), 달성성씨(達城成氏), 달성손씨(達城孫氏), 달성수씨(達城洙氏), 달성우씨(達城禹氏), 달성은씨(達城殷氏), 달성정씨(達城丁氏), 달성최씨(達城崔氏), 달성하씨(達城夏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경남 양산시 상북면 좌삼마을, 경남 양산시 매곡동,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경남 양산시 동부동, 경북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 경남 창원시 북면 외산리 현도마을, 전남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 전남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전남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대곡마을, 전남 여수시 소라면 죽림리, 전남 여수시 화장동 화산마을, 전남 여수시 소라면 차동마을, 전남 여수시 상암동 진례마을, 전남 여수시 소라면 복촌마을, 전남 여수시 소라면 웅서마을, 전남 여수시 소라면 시목마을,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경북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경북 안동시 수하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일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경북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충북 청원군 북이면 장재리 등이다. 경북 칠곡군 관내에는 2000년 현재 380여 가구 1,270여 명이 살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56명이 있다. 문과 36명, 무과 7명, 사마시 13명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달성서씨는 1985년에는 총 94,873가구 398,363명, 2000년에는 총 132,270가구 429,35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3만8천여 가구,3만1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80,434명, 부산 46,521명, 대구 35,298명, 인천 11,759명, 경기 39,513명, 강원 11,484명, 충북 12,385명, 충남 24,351명, 전북 20,566명, 전남 22,680명, 경북 39,572명, 경남 52,659명, 제주 1,121명이다. 경남, 부산, 경북, 대구 지역 등 영남권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77,562명, 부산 46,637명, 대구 40,468명, 인천 19,204명, 광주 5,442명, 대전 10,804명, 울산 14,127명, 경기 70,228명, 강원 9,243명, 충북 12,335명, 충남 14,303명, 전북 16,357명, 전남 15,145명, 경북 34,732명, 경남 41,361명, 제주 1,405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부산, 경남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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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달성서씨문 세거내력




 정의]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득선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여수시 세거 성씨.

[연원]

달성서씨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달성군(達成君)에 봉해지고 서씨 성을 받은 서진(徐晋)을 시조로 한다. 서진의 후손은 7세손 때 서제(徐濟)를 파조로 하는 현감공파(縣監公派), 서도(徐渡)를 파조로 하는 학유공파(學諭公派), 서섭(徐涉)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 서근중(徐近中)을 파조로 하는 감찰공파(監察公派)로 갈렸고, 이후 세계를 이어 오면서 다시 분파되었다.

[입향경위]

달성서씨 여수 입향은 명종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순천에서 살던 서득선(徐得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에 세거할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 뒤 인조 때 판서공파 서섭의 후예 서세남(徐世南)·서윤오(徐潤五) 형제가 대구에서 화양면 창무리에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뒤 효종 때에는 현감공파 서제의 후손 서의상(徐儀尙)이 역시 대구에서 소라면 죽림리에 정착했다.

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의 현손 서익성(徐翊省)이 통덕랑까지 지낸 뒤 율촌면 조화리로 옮겨 와 초야에 묻혀 살았다. 

숙종 때는 시조의 13세손 서계립(徐繼立)·서후기(徐後耆) 부자가 웅천동 웅서마을에 자리를 잡았으며,

영조 때는 서사룡(徐思龍) 대구에서 상암동 진례마을로 옮겨 살았으며, 서명선(徐命善) 순천에서 소라면 복촌마을로 이거했다.

[현황]

최초 입향자 판서공파 서세남·서윤오의 후손들은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소라면 복산리 대곡마을을 비롯하여 시내와 삼일동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현감공파로서 소라면 죽림리에 입향한 서의상의 후손들은 화장동 화산마을 소라면 죽림리 차동마을 등에 분산되어 큰 문중을 이루고 있다.

서계립의 후손들은 웅서마을 시목마을에 분가하여 터전을 닦고 살다가 신도시가 조성됨에 따라 분산되어 주거하고 있다. 

서익성의 후손들은 현재도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 살고 있다. 

또, 서사룡의 후손들은 현재에도 상암동 진례마을에 30여 호가 세거하고 있다.

[관련유적]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 화곡사(禾谷祠)가 있다. 

화곡사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으로 마을에 청추당(廳秋堂)을 지어 놓고 시인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일생을 보낸 호조참판(戶曹參判) 서병두(徐丙斗)를 추모하기 위하여 달성서씨 문중에서 193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출처] 시조 서진|작성자 담덕

제목: 정복규의 성씨순례

(17)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시조 서진(徐晋)은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에 이르기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대대로 달성에 살면서 달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있다. 

한편 대구서씨와는 지명만 같을 뿐 뿌리가 다르다.

시조의 증손 서균형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諫官)을 지냈다. 

당시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는 직언을 서슴치 않았고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아들 서침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조선이 개국한 후 조봉대부로 전의소감을 지냈다.

서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서문한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차남 서문간은 중시에 올라 역시 현감을 역임했다. 

막내 서문덕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가문의 기반을 닦은 인물은 조선 초기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다. 

그의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며 양촌 권근의 외손이다. 

그는 세종 2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 때까지 6대 왕조 45년에 걸쳐 6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다. 

서거정의 형 서거광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넷째 아들 서경주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와 결혼한다. 

둘째 아들 서경유의 증손 서종제의 딸은 영조비가 되었다. 

이 가운데 서경주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의 선봉수문장 서수천은 대나무로 뗏목을 만들어 노량해전에서 무공을 떨쳤다. 

한말에 와서는 서화에 탁월하여‘팔능(八能)’으로 일컬어졌던 서병오와 독립운동가로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이 있다. 

영친왕 결혼식전에 참석했던 총독부 요인과 이완용 등의 살해를 기도하다 잡힌 서상한(서상일의 아우)도 명성을 떨쳤다. 

 현대인물은 서정희(제헌국회의원), 서우석(제헌국회의원), 서돈각(전 경북대총장), 서성택(국민대재단이사장), 서정상(전 우석대이사장), 서익원(대구고검차장검사), 서경석(전 외무부기획관리실장), 서민석(동일방직사장), 서정한(한국합금철회장, 기독실업인회장), 서갑석(한국리스회장), 서명원(전 충남대총장), 서영호(전 재일대판거류민단장) 등이 있다. 


서울고검검사장을 지낸 서정국씨와 경전전무를 지낸 서정식씨는 형제간이며, 서원석(기업은행전무), 서형석(대우전무), 서이석(경기은행수원지점장)씨는 서정식씨의 세 아들이다. 

서정철(예비역육군준장), 서정학(예비역육군준장), 서정화(전 내무부장관), 서정신(법무부차관)도 형제간이다. 

조흥은행장, 기업은행장과 금융통화운영위원이던 서병찬씨가 삼촌이다. 

국회의원은 서청원, 서석재, 서종열, 서상목씨 등이 있다. 

서상철(전 동자부장관), 서영훈(전 국무총리), 서종철(전 국방장관), 서일교(대법관), 서윤홍(대법관), 서석준(전 상공부장관)도 후손이다. 

극작가 서항석씨,‘국화옆에서’의 서정주, 소설가 서기원, 천주교 대구교구대주교 서정길도 문중인물이다.(무순, 전 현직 구분 안됐음) 

 항렬자는 20世 열(烈), 21世 규(圭) 곤(坤) 규(奎), 22世 진(鎭) 석(錫) 현(鉉), 23世 수(洙) 영(泳) 윤(潤), 24世 상(相) 동(東) 춘(春), 25世 교(敎) 병(丙) 병(炳), 26世 보(輔) 정(廷) 규(圭), 27世 덕(德), 28世 (水변), 29世 (木변), 30世 (火변)이다.

 경남 양산시 상북면 좌삼마을은 달성서씨 집성촌이다. 

현재 이 마을은 양산에서 가장 많은 달성서씨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달성군 서진의 8세손이자 감찰공파인 서의손(徐義孫)이 조선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곡성현감으로 있을 때인 1531년(중종 26) 복성군 옥사에 연루되어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이곳에 은거하여 정착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서의손의 증손인 서중룡(徐仲龍)이 출정하면서 가족들을 이곳에 피난시켜 이주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 간 뿌리를 내렸다. 

경남 양산시 매곡동,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경남 양산시 동부동도 집성촌이다. 매곡 지역은 임진왜란 무렵 서몽호가 울산으로부터 와서 이곳에 살았다. 

답곡 지역 달성서씨들은 공조참의 서두조(徐斗祚)의 후손이다. 

 경북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에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입향조는 조선 후기 서순조(1684-1730)이다. 2000년 현재 380여 가구 1,270여 명이 칠곡군 관내에 살고 있다. 

경남 창원시 북면 외산리 현도마을도 집성촌이다. 

입향조 서사일이 약 350년 전에 호란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북면 마산리와 대방동에도 집성을 이루었으나 대방동은 창원공단지구 개발로 인하여 이주하면서 흩어져 버렸다.

 전남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도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조선 명종 때 서득선이다. 

그 뒤 서사원의 현손 서익성이 통덕랑까지 지낸 뒤 이곳으로 옮겨 와 초야에 묻혀 살았다. 

서익성의 후손들은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 살고 있다. 

인조 때 판서공파 서섭의 후손인 서세남, 서윤오 형제들은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와 소라면 복산리 대곡마을 등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현감공파로서 소라면 죽림리에 입향한 서의상의 후손들은 화장동 화산마을과 소라면 죽림리와 차동마을에 살고 있다.

 숙종 때 시조의 13세손 서계립, 서후기 부자는 웅천동 웅서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효종 때에는 현감공파 서제의 후손 서의상이 소라면 죽림리에 정착했다. 

영조 때 서사룡이 상암동 진례마을로 옮겨와 현재 30여호가 있다. 

서명선은 소라면 복촌마을, 서계립의 후손들은 웅서마을과 시목마을에 분가하여 터전을 닦고 살았으나 신도시 조성으로 분산됐다. 

 관련 유적은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 화곡사(禾谷祠)가 있다. 

면암 최익현의 문하생으로 마을에 청추당(廳秋堂)을 지어 놓고 시인 묵객들과 교류하면서 일생을 보낸 호조참판 서병두를 추모하기 위하여 달성서씨 문중에서 193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그밖에 달성서씨 집성촌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경북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경북 안동시 수하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일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경북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충북 청원군 북이면 장재리 등이다.

 주요파는 현감공파, 학유공파, 판서공파, 감찰공파, 진사공파, 생원공파, 진사공파, 참판공파, 종사랑공파 등 9파가 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56명이 있다. 문과 36명, 무과 7명, 사마시 13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429,353명이다. 서울 77,562명, 부산 46,637명, 대구 40,468명, 인천 19,204명, 광주 5,442명, 대전 10,804명, 울산 14,127명, 경기 70,228명, 강원 9,243명, 충북 12,335명, 충남 14,303명, 전북 16,357명, 전남 15,145명, 경북 34,732명, 경남 41,361명, 제주 1,405명이다.

 본관 달성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다. 

삼한시대에는 달구화 또는 달구벌이라 불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 때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 정복규: 성씨 전문기자, 성씨 전문강사 )

 jungbokyu@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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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 010-5162-8632

● < 한국의 성씨 > 연재 신문

신아일보/통일신문/충청일보/호남매일/전북매일/전주매일/

● 저서: 한국의 성씨(1,2권)/정복규의 성인유머집

● JTV 전주방송 TV특강 < 행복플러스 >

   제1강의- 유머있는 자녀로 키워라

   제2강의- 충전형 인간과 방전형 인간

● 통일부 남북통일 전문강사

   통일부 인터넷방송 < 북한지역 본관성씨 >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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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 유허비


달성공원(達成公園)은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달성이라는 이름은 옛날 대구를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벌(達伐), 달불(達弗)이라 표기한데서
 비롯되었
는데 높은 평지, 부락, 도성의 뜻인데 부근의 각종 출토물로 보아서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부족국가를 이루고  자연
적 구릉을 이용하여 그 위에 토성을 쌓은 성지(城趾)였다.

또 고려 때부터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세거지였으나  조선조  세종때 나라에 헌납하였고 임진왜란 와중인

선조 29년1596), 경상좌우도가 통합되면서 경상감영이 되기도 하였다.

건립:1971. 3. 22.

연대:고려중엽 정종(1035∼1406)때 봉군제에 따라 달성서씨 세거지로   사유가 되었던 달성을 조선세종 때 성지로

필요하여 조정에조건 없이 양도하고 그후 세거지기념으로 세운비              (건립자 : 달성서씨 대종회.)

* 유허비 (遺墟碑) 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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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 숭현사


종목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명칭 : 구암서원숭현사 (龜岩書院崇賢祠)
분류 :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서원
수량/면적 : 1동
지정(등록)일 : 1982.03.04
소재지 : 대구 북구 연암공원로 17길20(산격동)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달성서씨대종회
관리자(관리단체) : 달성서씨대종회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구암서원은 현종 6년(1665) 세웠고,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그 후 1924년 유림이 다시 지었다. 신명여고 운동장 오른쪽 언덕 아래에 북동쪽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경앙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유허비각이 있고 맞은편에 강당이 있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 추가 내용 -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년)에는 연구산에 있었으나 이후 1675년(숙종 원년) 3월 29일 유림에서 구계 서침(徐沈)선생을 봉안(奉安)하고 매년 제사 지내다가 1718년(숙종 44년)에 대구시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移建)한 것이다. 구계 서침은 세종이 달성 서씨 세거지로 사용하는 달성(현 달성공원)의 지형이 두형같고 주위가 천연적으로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 명승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남산고욕기와 바꾸도록 하는 한편, 대대로 세록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자 서침의 뜻에 따라 대구 지방 일대에 거둬들인 환곡의 이자를 감해 주기로 하였다 한다. 이에 은덕을 입은 대구지방 영남유림들이 서침의 송덕을 기리기 위하여 구암서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구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세우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을 증수(增修)하였다. 그후 숭현사는 대구지방문화재 건조물 제2호로 지정되어 수차례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1995년도에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번지 연암공원내로 이건(移建)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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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達城 徐氏)의 유래§


§ 서씨(達城 徐氏)의 유래§

서씨는 우리나라 전체인구(약 4,800만명)의 약 1.5%로 총274개 성씨중 제14위이고, 총 55개의 본관과 14만 4,320가구, 61만 1,148명이 있으며 이중 달성서씨 본관은 인구수 39만 8,343명이었으나,(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 2000년 인구수 429,353명이 되며 성씨중 17위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6만 6571가구에 인구 37만 7833명으로 성별(姓別) 순위는 258성 중 제14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4만 4320 가구, 인구 61만 1148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14위였으며, 2000년 인구수 429,353명이 되며 성씨중 17위다.)

서씨는 옛 문헌에 165개의 본관이 있었으나 현재 10개의 본관 이외에는 그 시조 및 유래를 알 수가 없다

서씨(徐氏)의 성씨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서씨의 기원은 단군시대(檀君時代) 〔예맥(穢貊):한(韓)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의 추장(酋長)인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각기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여(余)자에 중인변(衆人邊:?)을 붙여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서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위지 동사강목(魏志 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기자(箕子)의 40세손이고 고대(古代)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서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한다.

서씨사적정해(徐氏史跡精解)에 따르면,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날,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왕의 눈에 들어 만주에게 서씨(徐氏)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서신일은 이천 서씨(利川 徐氏)의 시조이며, 오늘날 이천서씨는 모두 서신일의 후손이고, 후에 이천 서씨에서 달성(達成),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부여(扶餘) 서씨로 분파되었고, 달성 서씨에서 다시 대구(大邱)서씨로 갈라져 모두 7개파로 분적되었으며, 이 모두가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고 한다.〈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

서씨(徐氏)의 대종(大宗)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52대 효공왕 때 아간대부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라 칭하고 후진 양성에 여생을 바쳤으며, 『동국만성보』와『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창업의 개국공신으로 아성(利川城의 이름)대장군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서, 그의 천품이 인자중후하여 서신일(徐神逸) 대에 이르러 산촌(山村)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 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의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세세(世世)로 재상(宰相)을 지내리라"고 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 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요, 필의 아들이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이천 서씨의 시조인 신라 아간대부 서신일 公의 묘소 및 신도비(神道碑)는 현재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서희(徐熙, 942~998년)장군은 서기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자 홀로 적진(敵陣)에 들어가 외교적 담판(談判)을 지어 돌려보냈으며, 다음해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용주, 흥화진, 통주, 철주, 구주, 곽주 등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압록강 이남의 옛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상두산)에 있다.〈경기도 지정 지방문화재 제36호〉

 한편 고려 초기에 서목(徐穆)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정(南征)할 때 태조를 받들어 인도하여 한천(漢川)에 이르러 대천(大川) 큰 냇물을 잘 건너게 했다는 공로로 이천백(利川伯)의 봉작(封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이천 서씨(利川徐氏)에서 분관(分貫)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서희(徐熙)의 아들 4형제 중 서주행(徐周行)이 달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니 막연하기 한이 없다. 이천 서씨에서 분관된 달성 서씨는 고려때 조봉대부로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고려조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는향파(鄕派)로 나누어졌는데, 조선 숙종(肅宗) 28년 서기 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충돌이 심하여, 결국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서기 1736년 경파(京派)만이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大邱徐氏)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위 두 파의 파조(派祖)는 다같이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고 있지만, 경파(대구 서씨)는 서한(徐閑)을 시조로 하여 그의 6대손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로 하고 있는 반면, 향파(달성 서씨)는 서한(徐閑)의 3대손(증손)인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서로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世系)상으로는 향파(달성 서씨)가 큰집이 된다.

 ※경파(京派) :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지냄  ▷대구 서씨분관

 ※향파(鄕派): 고향에 남아 벼슬과는인연 없이 지냄  ▷달성 서씨 분관

 달성(達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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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達城徐氏)의 유래 §


달성 서씨의 원조(遠祖) 서진(徐晋)은 고려시대 사람으로서 그의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지금으로부터 약 730여년전)로 추정되며, 부인은 초계 주(周)씨였다.

벼슬은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등을 역임하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大邱)에 봉해지고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았고, 후에 그의 아들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서영(徐潁)에 이르기까지 3代가 모두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며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어 본관을 달성(達城)이라고 하게 되었다.

달성 서씨 원조(遠祖)인 서진(徐晋)을 비롯하여 2代(서기준), 3代(서 영), 4代(서균형)의 묘소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문양동(봉계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향사일은 한식날이다. 

고려(高麗)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判圖判書) 달성군(達城君)이시다.
보의장군(保義將軍)으로 선유시(船遊時)에 [술과 노래에 취해 못돌아감 오래로다 그림같은 대동강에서 사람들아 장군으로만 보지 말라 내 또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네] 하셨다.
묘소는 함경도(咸境道) 녕원군(寧遠郡)이라 전해왔으나, 평남(平南) 녕원군(寧遠郡) 온화면(溫和面) 신덕리(新德里) 왕씨문중(王氏門中) 산안에 공의 묘가 있다 하기도한다.
부인(夫人)은 초계주씨(草溪周氏) 검교장군(檢校將軍) 치(穉)의 따님이시며 소부소감(少府少監) 현(鉉)의 손녀이시고 판군기사부(判軍器事石+夫)의 증손녀이시다
.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때 종2품의 문산계(문신에게 주는 품계) - 영록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고려때 판도사의 으뜸벼슬

 그후 후대로 내려와 현감공파(縣監公派 : 濟),학유공파(學諭公派: 渡), 판서 공파(判書公派 : 涉), 감찰공파(監察公派 : 近中),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蓮), 생원공파(生員公派 : 錫蓂), 진사공파(進士公派 : 錫笭), 참판공파(參判公派 : 宗一),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 震) 등 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서씨의 대종은 이천서씨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나 《조선씨족통보》에는 이천서씨에서 달성·장성·연산·남평·평당·부여 등이 갈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부여서씨의 시조는 서수손(徐秀孫)으로 되어 있으나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에는 부여서씨의 시조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태자인 부여 융(扶餘隆)으로서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당고종(唐高宗)으로부터 서씨성을 받았으며, 그 후손인 존(存)이 중시조로, 그리고 수손은 그의 11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달성서씨의 시조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증조부인 득부(得富)로 나와 있다..
달성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에 이천서씨가 많은 인물을 낸 것과는 반대로 조선시대에 달성서씨에서 많은 명신과 학자가 나왔음을 의미한다.

달성서씨의 대표적 인물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에서 6조(六曹)의 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학자로도 유명한 거정(居正)이다.

그의 종현손인 약봉(藥峰) 성()은 선조 때 5도의 관찰사와 호조·형조·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서인(西人)이 주동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고비로 약봉의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景雨)·경수(景需)·경빈()·경주() 중에서 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종제(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용보(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특히 종태(宗泰)·명균(命均)·지수(志修)의 3대상신(三代相臣)과 유신(有臣)·영보(榮輔)·기순(箕淳)의 3대대제학(三代大提學)이 유명하고, 또 명응(命膺:大提學)·호수(浩修:直提學)·유구(:吏判)의 3대는 다같이 문명이 높았다.

달성서씨의 세칭 '약봉집'은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으며, 숙종 때 서씨로서 참판급(參判級) 이상이 30여 명이나 되었으니 그 번창한 정도를 능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달성서씨는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지낸 경파(京派)와 고향에 남아 벼슬과는 인연 없이 지내온 향파(鄕派)로 크게 갈라진다. 두 파는 다같이 한()을 시조로 하고 있지만, 경파는 한의 6대손인 익진(益進)을, 향파는 한의 증손인 진(晋)을 각각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대동보(大同譜)도 따로따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상으로는 향파가 큰집이다.

경파 중의 '약봉집'으로는 한말의 개화파인 광범(光範)과 재필(載弼), 향파에서는 독립운동가인 상일(相日)과 서예가 병오(丙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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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서씨 9대派 및 각 파조◈◈


◈◈달성서씨 9대派 및 각 파조◈◈

 
1世
서진
徐晋












1世
2世
기준
奇俊












2世
3世













3世
4世
균형
 鈞衡









사달
士達
사민
士敏

4世
5世













5世
6世
문한
文翰


문간
文幹
문덕
文德
문덕
文德


세주
世柱


한정
翰廷

6世
7世



근중
近中

석련
錫蓮
석명
錫蓂
석령
錫領
종일
宗一




7世
공파
公派
현감
 縣監
학유
學諭
판서
判書
감찰
監察

진사
進士
생원
生員
진사
進士
참판
參判


종사랑
從仕郞

공파
公派
 8世


양원
楊源

 










     
     ※ 6世 침(沈)의 아들 문덕이 습(習)에 출계함.
 

   
학유공파(學諭公派) : 중시조는 7세손 학유공 서도(徐渡)이며, 호는 군줍, 일호는 월촌(月村)이다. 

벼슬은 조선 무공랑 성균관권지학유를 지냈다.

 

     ☞ 묘소는 영천군 금오면 구암동 마당골 신좌(辛坐)이고 향사는 한식(寒食)다음날에 한다.
               
판서공파(判書公派) : 중시조는 7세손 서섭(徐燮)이며, 조선시대 이조판서를 역임했음.
              
호잠파(湖岑派) :  중시조는 10세손 서수영(徐壽永, 1500 ~1565)이며, 벼슬은 조선 통정대부를 지냈다. 
                        (판서공파에서 분파함.)

 

     ☞ 묘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에 있다.
 소윤공(대구서씨 시조) : 도위공파. 춘원공파. 만사공파. 첨추공파. 서흥파. 봉사공파. 사강공파. 전첨공파. 
                               승사랑공파. 장원공파. 훈련봉사공파. 효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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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가문 달성서씨


우리 달성서씨는 대구를 관향의 기반으로 삼아 고려말 達城君(달성군)의 작위를 받으신 시조

 

版圖公(판도공)의 후손으로 판도공 이하 3대봉군(시조 達城君 휘 晉,2 達川君 휘 奇俊,3세 達城君 휘 穎)과

4세 貞平公(정평공) 휘 鈞衡(균형),5세 龜溪公(구계공) 휘 沈(침)에  이르기까지 5대가 大邱邑誌(대구읍지)에

 

실리는 명실상부한 명문거족의 閥族(벌족)이라 하겠다.

이러한 達城徐門(달성서문)을 나는 감히 忠(충).節(절)의 후손이라 말하고 싶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부귀와 영달을 꾀하지 아니하고 民草(민초)들의 아픔과 고통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으셨던 龜溪先生(구계선생)의 후손이기에...

龜溪公(구계공)께서는 先代(선대)의 세거지였던 達城(달성)을 조건없이 나라에 바치며 달성군민 모두에게

 

그 혜택을 골고루 입혔으며,수양대군의 서설퍼런 칼날 앞에서도 斥姦疏(척간소)를 올리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 찬탈하려는 무리들을 내치라는 직언을 하시고 귀향길에 오른 南隱公(남은공) 휘 涉(섭),

 

不事二君(불사이군)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선비의 도의를 지키셨던 遯庵公(돈암공) 휘 翰廷(한정),

 

遯齋公(돈재공) 휘 錫蓮(석련),南潮公(남조공)휘 錫蓂(석명),儉溪公(검계공) 휘 錫(석령)...


왜구의 말발굽 아래 무참히도 유린 당하며 풍전등화와 같은 壬辰亂(임진란)에 분연히 일어난 수많은 義兵將

 

(의병장)들 ...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선생 막하에서 칠백의사와 순절하신 忠烈公(시호) 휘 應時(응시),지리산 전투에서

 

순절하시고 병조참판을 증직하신 충렬공의 아드님이신 東巖公(동암공) 휘 致遜(치손),

招募鄕兵文(초모향병문)을 지어 (大丘)대구 최초의 의병모집을 주도하고 청안현감으로 제수되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규휼하고 학문을 일으켜 후진양성을 기하셨던 임란충의공신 대구의병대장 樂齋(낙재)

徐思遠(서사원)선생은 한강 정구선생,여헌 장현광선생과 더불어 嶺南三賢(영남삼현)으로 추앙을 받았고,

 

望潮堂(망조당) 휘 仁忠(인충)과 휘 夢虎(몽호)는 임란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의병모집 한 달여 만에

3,000여명의 의병을 집결시켜 수많은 전투에서 연전연승 하였으며,휘 인충께서는 부신진 첨사,휘 몽호는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으며, 망우당 곽재우장군과 창의하여 아금암전투와 화왕산전투에 참전하신

竹溪公(죽계공) 휘 再謙(재겸)과 아우인 죽계공과 함께 아금암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하신 휘 得謙(득겸),

 

충무공 이순신 막하의 선봉 수문장이었던 휘 壽千(수천)은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 노량해전에서 무공을

떨쳤고,直齋公(직재공) 휘 方慶(방경)은 경주에서 창의하여 경주판관을 제수 받았고,晩窩公(만와공)

 

휘 景沚(경지)는 영천에서 창의하여 이조참판을 증직하였고,耕齋公(경재공) 휘 承後(승후)는 망우당과

창의 하였고,낙재 서사원선생의 막하에서 창의하신 怡齋公(이재공) 휘 思進(사진)은 북산의병장,

 

樂山公(낙산공) 휘 思述(사술)은 초동의병장,이동의병장에 휘 行遠(행원),복병장에 휘 期遠(기원)등...

수많은 선조들께서 보여주신 애국.애민 정신이야말로 모든이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과 음덕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자랑스런 徐門(서문)의 후손임을 다음 세대에게 각인 시켜 줄 의무 또한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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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達城·대구서씨大丘徐氏


한국의 성씨 | 달성達城·대구서씨大丘徐氏

우리나라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277성으로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는 250성으로 조사되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의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서씨는 총 55개의 본관과 14만 4,320가구, 61만 1,148명으로 성씨 중 제 14위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서씨


서씨의 연원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모두 서씨의 종가인 이천利川 서徐씨에서 분관된 성씨이다. 우리나라 서씨의 기원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余씨에서 서徐씨로 변성되었다는 주장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추장酋長으로 있었는데 그에게 9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각기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들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여余자에 중인衆人 변邊을 붙여 서徐라고 고쳐서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둘째 기箕씨에서 서씨가 나왔다는 주장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의 기록에 따르면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지금의 경기도 이천利川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의 지명을 따서 성씨를 서씨라 하였다고 한다.

세째, 왕이 서씨를 사성했다는 기록이다. 「서씨사적정해徐氏史跡精解」에 따르면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만주에게 서씨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도시조都始祖 서신일徐神逸

이천 서씨와 달성, 대구 서씨의 시조는 서신일徐神逸이다. 그는 신라 헌덕왕 9년에 탄생하여 효공왕 때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더불어 경기도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處士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 그는 70이 넘도록 아들이 없자 아우 서신통이 자기 아들로 입사立嗣할 것을 권했으나 동생의 소생을 빼앗아 자식을 삼는 것은 인정에 반하는 것이라 하여 듣지 않고, 제자들의 권유에 따라 재취再娶를 보았다고 한다. 그 뒤 어느 날 사냥꾼에 쫓긴 사슴을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사슴이 자기 아들이라 하면서 살려준 은혜를 크게 감사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서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을 낳았는데, 그의 나이 80이 넘어서였다고 한다. 필의 아들이 고려 때 거란을 물리친 유명한 서희徐熙 장군이다.

이천 서씨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서신일)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서한)이라고 했다. 이천과 달성의 서씨는 신라 때 아간대부 서신일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徐命膺이 썼다. 이천 서씨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는 달성達成,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등의 서씨가 모두 서신일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 성씨 가운데 기준箕準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청주淸州 한씨韓氏, 태원太原 선우씨鮮于氏, 행주幸州 기씨奇氏 등이 있다.

달성의 역사

달성達城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다.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 때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대구시로 승격할 때 달성군의 가창嘉昌, 성서城西, 월배月背 등의 면이 대구시에 병합되었다. 1995년에 달성군은 경상북도로부터 대구광역시에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은 3읍 6면이다. 현재 군청 소재지는 논공읍이고, 다사읍과 화원읍이 있다.

성씨의 변천과정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한 뿌리

달성 서씨와 대구大丘(대구大邱가 아니고) 서씨는 서신일을 도시조로 하는 동근후손同根後孫이다. 하지만 두 집안은 시조를 달리하며 다른 본관을 쓰고 있다. 이들은 원래 달성 서씨의 향파鄕派와 경파京派였다. 향파는 벼슬을 멀리하며 시골생활을 했고 경파는 서울에 살며 대거 관직에 진출했다. 처음 두 집안은 조선 숙종 28년(1702)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하여 임오보壬午譜를 만들었으나, 의견 충돌로 경파가 단독 족보를 만들어 대구 서씨로 갈라서게 되었다. 달성 서씨 향파鄕派는 고려 봉익대부逢翊大夫, 판도판서判圖判書(조선의 호조판서) 등에 오르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晋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다. 달성 서씨의 분파로는 현감공파縣監公派, 학유공파學諭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로 나뉘어 있다.

반면 경파는 영조 이후 대구 서씨로 분관했는데 시조는 고려 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閈이다. 대구 서씨는 시조 서한 이후 2~6세의 세계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전객사典客司를 지낸 7세 서익진徐益進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조선의 대문호인 서거정과 약봉藥峯 서성徐渻 이후 가문이 크게 일어나 상신相臣(재상)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배출하는 명문거족으로 성장하였다. 분파로는 만사공파晩沙公派, 전첨공파典籤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도위공파都尉公派, 부봉사공파副奉事公派, 사가공파四佳公派, 서흥파瑞興派, 춘간공파春幹公派,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장원공파掌苑公派, 훈련봉사공파訓練奉事公派, 배산파 등 12개파가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달성 서씨는 총 13만 2270가구에 42만 93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달성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반면 대구 서씨는 총 7645가구에 2만 2751명으로 파악되었다. 대구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3명을 배출하였다.

달성 서씨와 대구 서씨는 광산光山 김씨, 연안延安 이씨와 함께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천 서씨가 해주海州 최씨, 남양南陽 홍씨 등과 함께 고려의 명문가로 이름이 높았다면, 달성·대구 서씨는 조선시대를 주름잡은 명문거족이었던 셈이다.

주요 인물들


6대에 걸쳐 3대 정승, 3대 대제학 배출

대구 서씨의 가문의 기반을 처음으로 닦은 인물은 조선 초기의 서거정徐居正이다.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성종 때까지 6대 왕조 45년에 걸쳐 6조 판서와 대제학大提學(학자로서 최고 권위)을 지냈다. 세조 6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문장, 시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세조 10년 조선시대 최초로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이 되었다. 이후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성종 1년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다음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에 봉해졌다. 여러 번 전형銓衡을 담당하여 많은 인재를 뽑았고 세조 때 「경국대전經國大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했고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했으며 또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한글로 번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에까지 정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성종 때 왕명에 의해 최초로 시문을 집대성한 「동문선東文選」을 편찬, 오늘에 전하고 있는 점이다. 신라 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시문을 골라 실은 동문선은 한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형 서거광徐居廣은 무과를 거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고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이르렀다. 서거정 이후 가세가 크게 위축되었던 대구 서씨는 서거광의 현손玄孫 서성徐渻 대에 이르러서야 현달할 수 있었다.

약봉藥峯 서성은 선조 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암행어사로서 삼남三南을 순찰하고 돌아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뒤에 호조, 형조, 공조의 판서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형조, 병조의 판서를 지냈다. 학문에 능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들들 중에서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霌의 자손이 가장 번성하였다. 서경주의 현손인 서종태徐宗泰(영의정)-서명균徐命均(좌의정)-서지수徐志修(영의정)의 3대에 이르는 재상이 배출되었는데, 그 자손에서 다시 서유신徐有臣(대제학)-서영보徐榮輔(대제학)-서기순徐箕淳(대제학)에 이르는 3대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즉 6대에 걸쳐 3대 정승, 3대 대제학을 배출, 가문의 골격을 이루었다.

서종태와 사촌 형제간인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 집안에서는 자손 3대에 걸쳐 학자가 배출되었으니 곧 서명응徐命膺(대제학)-서조수徐造修(직제학)-서유구徐有榘(대제학)가 그들이며 그중에서도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농정가農政家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다. 서유구는 정조 14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헌종 때 좌우찬성, 대제학에 이르렀다. 실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백가서에도 통달하여 문명이 높았다. 순조 34년 호남순찰사로 노령남북을 돌아보던 중 기근을 겪고 있는 백성들의 궁핍을 목격하고 나서 일본에 가는 통신사 편에 부탁하여 고구마 종자를 구입, 각 고을에 나눠주어 재배를 장려하고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그 재배법을 널리 알렸다. 농정農政에 대한 경륜과 상소문을 써서 영농법의 개혁을 누차 역설했고, 만년에는 친히 농사를 지으며 농업에 대한 백과사전인 「임원경제16지林園經濟十六志」라는 저술을 남겼다.

참고로 삼대 정승을 배출한 집안은 대구 서씨 외에 청송 심씨(심덕부·심온·심회), 동래 정씨(정유길·정창연·정태화), 청풍 김씨(김구·김재로·김치인)가 있다.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으로는 대구 서씨 외에 광산 김씨(김만기·김진규·김양택), 연안 이씨(이정구·이명한·이일상), 그리고 전주 이씨(백강 이경여 집안) 집안이다. 그런데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대구 서씨가 유일하다.

달성, 대구 서씨 근현대 인물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詩書畵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

서광범徐光範은 박규수, 오경석 등의 영향을 받아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서광범의 증조부는 영의정 서용보徐龍輔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이다.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 망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김홍집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임용되었으며, 내무대신 박영효와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내각이 무너지자 공사직에서 해임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폐병으로 죽었다.

서재필徐載弼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충남 논산에서 자라다 서울로 왔다. 갑신정변 때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냉대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내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아들은 굶어 죽었다.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듬해 미국 철도우편사업 창설자의 딸인 뮤리얼 암스트롱과 결혼하였다. 갑오경장 후 박영효의 권유로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수구파 정부와 러시아, 일본 측의 추방운동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3·1운동 후 미국에서 한국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이승만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하였다. 광복을 맞은 후 미군정의 고문 역할을 하는 동안 대통령 추대를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와 시국 혼란을 개탄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이외 달성, 대구서씨 현대인물로는 정계에서는 서정희, 서우석(이상 제헌국회의원), 서인석, 서청원, 서석재, 서종열, 서상목, 서병수, 서갑원, 서영교(이상 국회의원), 서동권(법무부장관·국가안전기획부장), 서정화(내무부장관), 서석준(상공부장관), 서상철(동자부장관), 서종철(국방부장관), 서승환(국토부장관), 서일교·서윤홍(대법관), 서정신(법무차관), 서경석(외무부 기획관리실장)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서돈각(경북대총장), 서성택(국민대이사장), 서정상(우석대이사장), 서명원(충남대총장)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서민석(동일방직사장), 서정한(한국합금철회장), 서갑석(한국리스회장), 서병찬(조흥은행장) 등이 있으며, 시인 서정주, 극작가 서항석, 소설가 서기원, 가수 서수남, 배우 서인석 등이 달성·대구 서씨 문중 인물이다(전·현직 및 달성·대구 서씨 구분 없음).

집성촌

경남 양산시 상북면 좌삼마을은 달성 서씨 집성촌이다. 현재 이 마을은 양산에서 가장 많은 달성 서씨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달성군達城君 서진徐晉의 8세손이자 감찰공파인 서의손徐義孫이 조선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곡성현감으로 있을 때인 1531년(중종 26년) 복성군福城君 옥사에 연루되어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이곳에 은거하여 정착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여년 간 서씨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경남 양산시 매곡동, 경남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경남 양산시 동부동도 집성촌이다.

경북 칠곡군 기산면 노석리에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입향조入鄕祖는 조선 후기 서순조徐舜肇(1684-1730)이다. 2000년 현재 380여 가구 1,270여 명이 칠곡군 관내에 살고 있다. 경남 창원시 북면 외산리 현도마을도 집성촌이다. 입향조 서사일徐思逸이 약 350년 전에 호란胡亂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전남 여수시 율촌면 조화리도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조선 명종 때 서득선徐得善이다. 그밖에 달성서씨 집성촌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동리, 경북 상주시 공성면 평천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조산리, 경북 안동시 수하동,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사일리,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경북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충북 청원군 북이면 장재리 등이다.

중국의 서씨

중국의 서徐(Xu)씨는 중국에서 성씨 순위 10위이다. 인구는 대략 2,000만 명이다. 서씨 성은 영嬴씨에서 비롯되었고, 고요皋陶의 후예다. 고요가 백익伯益을 낳았고, 백익은 우禹를 보좌해 공을 세웠다. 우가 백익의 아들 약목若木을 서徐에 봉하여 서나라를 세웠다. 중국에서는 약목을 서씨의 원시조로 한다. 중국 기록에서 고요는 동이족이라고 전한다. 언왕偃王 역시 마찬가지다. 서나라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서이徐夷로 불리웠다. 서徐나라는 약목에서 언왕偃王까지 32대를 이어가다가 주나라에게 멸망되었다. 후에 주 목왕이 언왕偃王의 아들 종宗을 서자徐子로 명명하고 서국徐國을 회복하였다. 서자 종의 11세 손인 장우章禹에 이르러 서나라는 오나라에게 멸망되었는데 장우의 자손은 나라 이름인 서를 성씨로 취하였다. 유명한 인물로는 진시황 때의 낭야琅琊 방사方士 서복徐福(서불徐市)이 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서선徐宣, 서유자徐孺子(서치徐穉)와 서서徐庶가 유명하고,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이 있다. 남송南宋에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등이 있고 명나라 말기에 호족 서수휘徐壽輝,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 대학자 서광계徐光啓가 있다. 서나라의 옛 땅은 오늘날 강소성 서북부와 안휘성 동북부이다.



〈참고자료〉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춘추필법, 2009
〈참고사이트〉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http://blog.naver.com/tlfdksro7)
성씨 정보(http://www.surname.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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